
어쩌다 80년 된 책을 집어 들게 되었나
문득 이런 생각이 들었다. 나는 사람들과 잘 지내고 있는 걸까?
최근 들어 인간관계가 전처럼 자연스럽지 않다는 느낌을 받곤 한다. 업무 메신저로 주고받는 딱딱한 대화들, 화상회의 속 어색한 침묵들, 그리고 점심 한 끼를 함께 먹기도 어려워진 일상들. 혹시 내가 사람들과 소통하는 방법을 잊어버린 건 아닐까 하는 불안감이 스멀스멀 올라왔다.
그런 어느 날, 서점에서 우연히 마주친 것이 바로 데일 카네기의 '인간관계론'이었다. 1936년에 나온 책이라고 하니, 우리 할아버지가 태어나기도 전의 이야기다. 과연 이런 오래된 책이 지금의 나에게 무슨 의미가 있을까 싶었지만, 묘하게 끌리는 무언가가 있었다.
가만히 생각해보면, 요즘 쏟아지는 인간관계 관련 콘텐츠들은 대부분 SNS나 온라인 소통에 집중되어 있다. 하지만 정작 내가 어려워하는 건 그런 기술적인 부분이 아니라, 사람 마음의 깊은 곳에 닿는 진짜 소통이었다. 그래서였을까. 80년 전 사람들도 나와 같은 고민을 했을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첫 페이지부터 무너진 내 자존심
책을 펼치자마자 얻어맞은 기분이었다.
"사람을 비판하거나, 비난하거나, 불평해서는 안 된다."
이 한 문장을 읽는 순간, 지난주 팀 미팅에서의 내 모습이 떠올랐다. 후배가 실수한 부분에 대해 "왜 미리 확인하지 않았죠?"라며 따지듯 물었던 것. 그때는 당연한 질문이라고 생각했는데, 지금 돌이켜보니 그 후배의 표정이 어땠는지 선명하게 기억났다.
카네기는 말한다. 사람은 논리적인 존재가 아니라 감정적인 존재라고. 아무리 논리적으로 옳은 말이라도, 상대방의 자존심을 건드리면 마음의 문은 닫힌다고.
그렇다면 나는 지금까지 얼마나 많은 사람들의 마음 문을 닫게 했을까? 생각만 해도 섬뜩했다.
이름을 부르는 것의 마법
책에서 가장 인상 깊었던 부분 중 하나는 '이름의 힘'에 관한 이야기였다. 카네기는 사람에게 가장 달콤한 소리는 자신의 이름이라고 했다.
이 말을 읽고 나서 문득 깨달았다. 나는 언제부터인가 사람들의 이름을 제대로 부르지 않고 있었다는 것을. 동료들과 대화할 때도 "저기요", "실례합니다" 같은 말로 시작하거나, 아예 이름을 부르지 않고 바로 용건부터 말하곤 했다.
그래서 며칠 전부터 의식적으로 상대방의 이름을 부르기 시작했다. "민수 씨, 어제 말씀하신 그 건 어떻게 되었나요?" 이런 식으로. 처음에는 어색했지만, 상대방의 반응이 확실히 다르다는 걸 느낄 수 있었다. 표정도 더 밝아지고, 대화도 더 자연스러워졌다.
별것 아닌 것 같지만, 이름을 부르는 것만으로도 상대방에게 '당신을 한 명의 소중한 개인으로 인식하고 있다'는 메시지를 전달할 수 있다는 걸 깨달았다.
듣기의 기술, 그리고 내 안의 변화
개인적으로 생각해보니, 나는 대화할 때 상대방의 말을 온전히 듣기보다는 내가 할 말을 준비하고 있었다. 상대방이 말하는 중간에 이미 머릿속으로는 반박하거나 조언할 내용을 정리하고 있었던 것이다.
카네기는 말한다. 사람들은 자신의 이야기를 들어주는 사람을 좋아한다고. 그리고 훌륭한 대화가는 말을 잘하는 사람이 아니라 듣기를 잘하는 사람이라고.
이 부분을 읽으면서 떠오른 사람이 있었다. 대학 시절 친했던 선배였는데, 그 사람과 대화하고 나면 항상 기분이 좋아졌다. 왜 그럴까 곰곰히 생각해보니, 그 선배는 내 말을 정말 집중해서 들어주었고, 중간중간 적절한 반응을 보여주었다. 자신의 이야기를 하더라도 내 이야기와 연결해서 해주곤 했다.
그때 깨달은 건, 사람들이 원하는 건 해결책이 아니라 공감이라는 것이었다. 물론 때로는 조언이나 해결책이 필요할 때도 있지만, 대부분의 경우 사람들은 그저 자신의 이야기를 들어주기를 원한다.
논쟁의 무용함을 깨닫다
"논쟁에서 이기는 유일한 방법은 논쟁을 피하는 것이다."
이 문장을 읽었을 때는 솔직히 납득하기 어려웠다. 옳고 그름이 분명한데 왜 논쟁을 피해야 하는가? 특히 일에 관해서는 명확히 해야 할 것들이 있지 않은가?
하지만 곰곰히 생각해보니, 그동안 내가 '논리적 토론'이라고 생각했던 것들 중 상당 부분이 사실은 '내가 옳다는 것을 증명하고 싶은 욕구'에서 비롯된 것이었다. 상대방을 설득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내 자존심을 지키기 위해서였던 것이다.
얼마 전 있었던 일이 떠올랐다. 프로젝트 진행 방식을 두고 동료와 의견 차이가 있었는데, 나는 내 방식이 더 효율적이라는 걸 증명하려고 애썼다. 데이터도 찾아보고, 사례도 들어가며 열심히 설명했다. 하지만 결과는? 동료는 더욱 자신의 의견에 고착되었고, 우리 사이에는 미묘한 껄끄러움만 남았다.
그때 카네기의 방법을 적용해봤다면 어땠을까? 먼저 동료의 의견을 충분히 듣고, 그 장점을 인정한 다음, 내 의견을 부드럽게 제시했다면? 아마 전혀 다른 결과가 나왔을 것이다.
인정받고 싶어하는 마음
경험상 느낀 점은, 사람들은 누구나 인정받고 싶어한다는 것이다. 그것도 진심에서 우러나는 인정을.
카네기도 이 점을 강조한다. 사람의 가장 깊은 욕구 중 하나가 바로 '중요한 사람이 되고 싶은 욕구'라고. 그리고 이 욕구를 충족시켜주는 사람을 사람들은 좋아하게 된다고.
하지만 여기서 중요한 건 진정성이다. 단순히 아첨하거나 빈말로 칭찬하는 게 아니라, 정말로 상대방의 좋은 점을 찾아서 인정해주는 것. 이것이야말로 진짜 인간관계의 기술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최근에 이런 일이 있었다. 신입사원이 작은 실수를 했을 때, 예전 같았으면 "다음부터는 더 주의하세요"라고 말했을 텐데, 이번에는 "평소에 정말 꼼꼼하게 일하시는데, 오늘은 좀 바쁘셨나 봐요. 이런 실수는 누구나 할 수 있어요"라고 말했다.
그 신입사원의 표정이 확 달라지는 걸 봤다. 그리고 그 이후로 더욱 신중하게 일하는 모습을 보여주었다. 비난보다는 이해와 격려가 훨씬 큰 힘을 가지고 있다는 걸 실감했다.
80년 전 책이 주는 현재의 깨달음
이 책을 읽으면서 가장 놀라웠던 점은, 80년이라는 시간이 무색하게 느껴질 만큼 현재에도 그대로 적용된다는 것이었다.
기술은 엄청나게 발전했다. 이제 우리는 스마트폰으로 전 세계 사람들과 실시간으로 소통할 수 있고, 화상회의로 언제든 얼굴을 보며 대화할 수 있다. 하지만 사람의 마음은 80년 전이나 지금이나 별반 다르지 않다.
여전히 사람들은 인정받고 싶어하고, 자신의 이야기를 들어주는 사람을 좋아하며, 비난보다는 이해받기를 원한다. 디지털 네이티브라고 불리는 젊은 세대들과 일할 때도 마찬가지였다. 표현 방식은 조금 다를지언정, 본질적인 욕구는 같았다.
메신저 시대의 인간관계론
그렇다면 메신저와 이메일로 소통하는 지금 시대에 카네기의 원칙들을 어떻게 적용할 수 있을까?
문득 이런 생각이 들었다. 온라인 소통이야말로 더욱 세심한 배려가 필요한 것 아닐까? 표정이나 목소리 톤을 읽을 수 없는 상황에서는 글의 뉘앙스가 더욱 중요하니까.
예를 들어, 예전에는 업무 메신저에서 "이 부분 수정 바랍니다"라고 직설적으로 보냈다면, 이제는 "고생 많으셨는데, 이 부분만 조금 수정해주시면 완벽할 것 같아요. 혹시 시간 되실 때 확인 부탁드립니다"라고 보낸다.
별것 아닌 차이 같지만, 받는 사람 입장에서는 전혀 다르게 느껴질 것이다. 첫 번째는 명령처럼 들리지만, 두 번째는 요청처럼 들린다. 그리고 상대방의 노고를 인정하고 있다는 메시지도 함께 전달된다.
변해가는 나, 그리고 주변의 반응
이 책의 원칙들을 의식적으로 적용한 지 몇 개월이 지났다. 처음에는 어색하고 억지스러운 느낌도 있었지만, 점차 자연스러워졌다. 그리고 무엇보다 주변 사람들의 반응이 달라진 것을 느낄 수 있었다.
동료들과의 대화가 더 편안해졌다. 예전에는 일 이야기만 하다가 끝나는 경우가 많았는데, 이제는 개인적인 이야기도 나누게 되었다. 누군가는 최근에 본 영화 이야기를, 누군가는 주말에 있었던 일들을 자연스럽게 얘기한다.
그리고 놀랍게도, 사람들이 먼저 나에게 조언을 구하거나 의견을 묻는 경우가 늘어났다. 예전에는 내가 먼저 나서서 조언하려고 했는데, 이제는 사람들이 스스로 찾아온다. 아마도 내가 비판하거나 판단하지 않고 들어줄 거라는 신뢰가 생겼기 때문인 것 같다.
여전히 어려운 것들
하지만 모든 것이 순조롭지만은 않다. 여전히 어려운 상황들이 있다.
예를 들어, 정말 잘못된 일을 하는 사람에게도 무조건 이해하고 공감해야 하는 건지 헷갈릴 때가 있다. 또한 상대방이 악의적이거나 조작적인 경우에는 카네기의 원칙들이 오히려 이용당하는 느낌이 들 때도 있다.
그리고 때로는 명확한 피드백이나 비판이 필요한 상황도 있다. 특히 업무적으로는 잘못된 것을 잘못되었다고 말해야 할 때가 분명히 있다. 이런 경우에 어떻게 카네기의 원칙과 균형을 맞춰야 할지는 여전히 고민 중이다.
진정성이 전제되어야 하는 기술
이 책을 읽으면서 가장 중요하다고 생각한 것은 바로 진정성이었다. 카네기의 모든 원칙들은 상대방을 진심으로 이해하고 존중한다는 마음가짐이 전제되어야 한다.
만약 단순히 기술적으로만 접근한다면? "사람들을 조종하는 방법" 정도로 전락할 수도 있다. 하지만 진심으로 상대방의 입장에서 생각하고, 정말로 좋은 관계를 만들고 싶다는 마음이 바탕에 있다면, 이 원칙들은 강력한 힘을 발휘한다.
개인적으로는 이 책을 통해 인간관계에 대한 근본적인 관점이 바뀌었다. 예전에는 '내가 어떻게 하면 다른 사람들이 내 말을 들을까?'라고 생각했다면, 이제는 '내가 어떻게 하면 다른 사람들에게 도움이 될 수 있을까?'라고 생각하게 되었다.
그리고 이런 변화가 결과적으로 내게도 더 큰 도움이 되었다는 것을 깨달았다. 다른 사람들을 먼저 이해하려고 노력하니, 그들도 나를 이해하려고 노력해주었다. 진심으로 관심을 보이니, 그들도 나에게 진심을 보여주었다.
현재진행형인 나의 변화
비슷한 상황에 있는 분들이라면 공감하겠지만, 사람이 변하는 건 정말 어려운 일이다. 특히 오랫동안 굳어진 소통 습관을 바꾸는 것은 더욱 그렇다.
하지만 그 변화가 주는 기쁨은 정말 크다. 사람들과의 관계가 더 따뜻해지고, 일상이 더 풍요로워진다. 무엇보다 나 자신이 더 평화로워진다. 다른 사람을 이해하려고 노력하다 보니, 나 자신에 대해서도 더 관대해졌다.
지금도 여전히 실수할 때가 있다. 바쁘거나 스트레스를 받으면 예전 습관이 나오기도 한다. 하지만 예전과 다른 점은, 그런 순간들을 빨리 알아차리고 수정하려고 노력한다는 것이다.
마침표 대신 쉼표를
이 책을 덮으며 드는 생각은, 인간관계도 결국 하나의 기예라는 것이다. 악기를 배우거나 운동을 배우는 것처럼, 지속적인 연습과 노력이 필요한.
80년 전에 쓰인 책이지만, 그 안에 담긴 인간에 대한 통찰은 여전히 유효하다. 아니, 오히려 개인화되고 파편화된 현대 사회에서 더욱 절실하게 필요한 지혜들이다.
가만히 생각해보면, 결국 우리가 추구하는 모든 것들 - 성공도, 행복도, 성취도 - 모두 사람과의 관계 속에서 이루어진다. 혼자서는 아무것도 할 수 없다. 그렇다면 사람과 잘 지내는 기술을 배우는 것보다 더 중요한 공부가 있을까?
이 책을 통해 시작된 나의 변화는 아직 현재진행형이다. 앞으로도 계속 배우고 연습해야 할 것들이 많다. 하지만 이제는 확신할 수 있다. 진심으로 다른 사람을 이해하려고 노력하는 것, 그것이야말로 가장 아름다운 인간관계의 시작이라는 것을.
그리고 그 시작을 위한 첫 번째 단계는, 바로 이 책을 펼쳐보는 것일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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