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언젠가 외국 소설을 읽다가 문득 이런 생각이 들었다. '이 아름다운 문장이 원래 언어로는 어떻게 표현되었을까?' 그때 나는 번역이라는 작업이 단순히 언어를 바꾸는 일이 아니라는 것을 어렴풋이 깨달았다. 홍한별의 『흰 고래의 흼에 대하여』를 읽으며, 그날의 막연한 궁금증이 명확한 깨달음으로 변했다.
잡히지 않는 공허, 포착할 수 없는 의미
홍한별은 책에서 이렇게 말한다. "번역을 시도한 적이 있는 사람은 누구나 흰 고래 같은 텍스트를 만났을 것이다. 잡히지 않는 공허, 포착할 수 없는 의미. 이쪽을 붙들면 저쪽을 놓치고, 저쪽을 잡으면 이쪽이 사라지는 단어를, 의미를 고정하는 순간 무수한 틈이 생겨버리는 그것을 어떻게 표현할 것인가?"
이 문장을 읽는 순간, 나는 번역가들이 직면하는 딜레마의 본질을 이해하게 되었다. 멜빌의 『모비딕』에서 아합 선장이 흰 고래를 쫓듯, 번역가들도 완벽한 번역이라는 흰 고래를 쫓고 있었던 것이다. 그리고 그 추적은 때로는 절망적이고, 때로는 숭고하다.

클레어 키건의 『이처럼 사소한 것들』, 가즈오 이시구로의 『클라라와 태양』, 애나 번스의 『밀크맨』 등 90여 권의 번역서를 출간한 홍한별은 이 책에서 자신이 만난 '흰 고래들'의 이야기를 들려준다. 각각의 작품마다 다른 얼굴을 한 난해함들, 문화적 맥락의 차이로 인한 번역의 불가능성, 그리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계속해야 하는 번역가의 숙명을.
번역은 배신인가, 재창조인가
특히 인상 깊었던 부분은 한강의 『채식주의자』 영어판 논란에 대한 저자의 해석이었다. 홍한별은 번역이 원작에 대한 '배신'이라는 비판을 정면으로 다룬다. 하지만 그녀가 제시하는 관점은 다르다. 번역은 배신이 아니라 '재창조'이며, 때로는 '지배적 서사에 균열을 만드는' 작업이라는 것이다.
이 부분을 읽으며 나는 번역에 대한 기존의 생각을 완전히 뒤집게 되었다. 번역가는 단순한 언어 변환자가 아니라, 두 문화 사이에서 새로운 의미를 창조하는 예술가였던 것이다. 그들은 원작의 충실한 복사본을 만드는 것이 아니라, 새로운 언어 환경에서 원작의 정신이 살아 숨 쉴 수 있도록 하는 일종의 '부활술사'였다.
AI 시대, 번역가의 존재 이유
책의 또 다른 핵심 주제는 AI 발전이 번역 분야에 미치는 영향이다. 홍한별은 AI 번역의 등장으로 인한 번역가들의 불안을 솔직하게 드러낸다. 하지만 동시에 그녀는 인간 번역가만이 할 수 있는 일의 고유성을 강조한다.
"AI는 정확한 정보를 전달할 수 있지만, 문학 번역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정확성이 아니라 문학성이다." 이 말은 나에게 깊은 울림을 주었다. 기계가 아무리 발달해도, 행간의 의미를 읽고, 문화적 뉘앙스를 파악하고, 작가의 의도를 새로운 언어로 재탄생시키는 일은 여전히 인간만이 할 수 있는 영역이라는 것이다.

언어 사이의 다리를 놓는 사람들
홍한별의 글을 읽으며 가장 감동받은 부분은 번역가들의 사명감에 대한 이야기였다. 그들은 단순히 돈을 벌기 위해 번역하는 것이 아니라, 서로 다른 문화권의 사람들이 소통할 수 있도록 돕는 일에 자부심을 느낀다는 것이다.
"번역은 언어 사이의 다리를 놓는 일이다." 이 문장이 내 마음에 깊이 새겨졌다. 우리가 외국 문학을 통해 감동받고, 다른 문화를 이해하고, 인간의 보편적 감정을 공유할 수 있는 것은 모두 이 '다리'가 있기 때문이다.
완벽하지 않기 때문에 아름다운
홍한별은 번역의 불완전성을 인정한다. 어떤 번역도 원작을 100% 재현할 수는 없다고 말한다. 하지만 바로 그 불완전성이 번역의 매력이라고도 한다. 완벽한 번역이 불가능하기 때문에, 번역가들은 끊임없이 더 나은 표현을 찾아 헤맨다. 그리고 그 과정에서 때로는 원작보다 더 아름다운 문장이 탄생하기도 한다.
이 책을 읽고 나서, 나는 번역서를 읽는 태도가 완전히 달라졌다. 이제는 번역자의 이름을 먼저 확인하고, 그들이 어떤 선택을 했는지 상상해본다. 어떤 고민을 했을지, 어떤 '흰 고래'와 씨름했을지 생각해본다.
번역가들에게 바치는 경의
『흰 고래의 흼에 대하여』는 번역가들의 숨겨진 고군분투를 세상에 드러낸 귀중한 기록이다. 홍한별은 번역이라는 행위의 숭고함과 동시에 그 한계를 솔직하게 보여준다. 그리고 그 모든 과정을 통해 우리는 언어의 신비와 문학의 힘을 새롭게 발견하게 된다.
이 책을 덮으며 나는 모든 번역가들에게 깊은 감사를 느꼈다. 그들이 있기에 우리는 세계 문학의 보고를 탐험할 수 있고, 다른 문화의 사람들과 마음을 나눌 수 있다. 비록 그들이 쫓는 '흰 고래'를 완전히 잡을 수는 없을지라도, 그들의 노력 덕분에 우리의 정신적 지평은 무한히 확장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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